빌런X영웅

 

 

 

감았던 눈을 뜨면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밝아진 시야로 주의를 한 번 둘러보고 심호흡을 깊게 내쉬어본다. 바쁘게 날 지나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반대방향을 향해 걸음을 천천히 옮기다 보면 어느새 굳게 닫힌 문앞에 도착한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차가운 냉기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몸이 살짝 떨려온다. 하지만 난 이 문을 열어야 했고, 문 뒤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해야만 했기에 열고 상황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무척이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화면에 나타나 있는 지도와 빨간 점들은 사고지점을 나타내는 거란 걸 물어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서로 어디로 배치가 되고 어디로 나가야 되는지 지휘하느라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여기 있어봤자 방해만 될 듯해 그냥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가려는 찰나 중심가 부분에 커다랗게 빨간색 표시가 떴고 마치 위험하단 걸 알리는 듯이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다. 내가 찾고 있던 그였다.

 

 

"현화. 자네는 여기 남아."

"왜요? 이쪽 일은 제 담당이잖아요."

"...저건 누구를 뜻하는지 자네가 더 잘 알잖아."

 

 

걱정어린 저 눈빛. 진심이 담겨있지만, 걱정일지 아니면 동정을 담은 눈빛인지 알 수 없었다. 저런 표시가 나타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건 나뿐이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인재를 잃을 수 없다며 항상 이런 경우마다 나를 빼 온 거에 대해 참을 수 없었다. 내 팔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는 말에 "상관 말아요. 내 일이에요."라고 쏘아붙이며 출동하는 무리 속에 섞여 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뒤통수가 무척이나 따갑게 느껴졌다. 차에 탄 인원들이 나를 한 번씩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원래 이런 임무 쪽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었고 더욱더 이번 같은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나올 수 있단 이유로 계속 배제됐는데 이제 와서 같이 활동한다는 것에 관심을 두는 걸지도 모른다. 

 

 

"그만 쳐다봐요. 전 제 일을 하러 온 것 뿐이에요."

 

 

그 말 한마디에 시선을 돌리는듯한 느낌이 든다. 저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닌 나와 '그 사람'의 관계겠지. 차 안에는 적막이 흐르고 바깥의 소리가 소란스러워 지는 것을 보면 아마 현장 근처까지 온 듯했다. "도착했다."라는 말과 함께 일제히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고 어서 나가자고 말을 하려다 떨리는 손을 발견했는지"천천히 나오세요." 내 옆에서 묵묵히 운전하던 그는 걱정스럽단 목소리를 남기고 내렸다.

 

차 안에는 나 혼자 남아있었다. 손이 떨려오지만 차만 타면 이런다는 걸 그만이 알고 있었고, 그는 지금 내 옆에 없었기에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손목을 꽉- 붙잡았다. 어느 정도 떨림이 멈춰오고 손을 놓자 손목에는 빨갛게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가만히 빨간 자국을 바라보다 심호흡을 한번 내쉬고는 차 문을 열어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내가 내리지 않고 남아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들은 이미 바닥에 피를 흘리면서 널브러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없나- 라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부서진 건물잔해와 무기들, 피를 흘리면서 널브러진 동료 사이에서 발견한 것은 피를 밟아 생긴 발자국이었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이 일의 근원이자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따라가 보았다.

 

 

"어서 와. 현화."

 

 

발자국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아무도 없고 부서진 건물 잔해들만 곳곳에 널려있는 도시의 중심이었다. 높게 쌓아올려 진 잔해의 위해 누군가 앉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지만, 햇빛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면서 누가 부르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찌그러진 눈과 햇빛을 피하고자 손을 올린 사이 높은 곳에 올라앉아서 날 내려다보던 사람이 내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누군가의 힘으로 손을 강제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야."

"이거 놔요."

 

 

그늘이 져 있었고, 내 눈앞에는 그가 서 있었다. 신경질적인 말투로 내뱉었고 놓지 않을 것만 같았던 손을 금방 놓아버리는 그였다. 놓자마자 잡혀있었던 손목 부분이 아려오기 시작했고 다른 손으로 움켜잡아 아픈 것을 풀어보기 위해 이리저리 손목을 움직이면서 그를 쳐다보자 뭐가 좋은 것인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그는 평소 계속 봐오던 모습과 똑같은 그였다. 임무나 임무를 나갈 때 입던 정장도 똑같았고, 그의 무기이자 상징인 방패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변한 거라면 누군가의 죽임이 불필요한 경우라면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그였더라면 지금은 징표라도 되듯이 다른 사람의 피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닦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손을 걷어 내려 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할려고 했는지 알아차린 그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 쪽으로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내 손을 잡은 그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선을 따라 천천히 내리더니 입술 주변에 다다르자 따뜻하면서도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히이익-!"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을 건데."

"갑자기 그러면 안 놀라요?"

 

 

깜짝놀라 자칫하면 주먹이 나갈뻔했다. 놀라서 두근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의 두근거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급하게 손을 빼면서 당황하는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옅은 미소를 짓는 그였다. 이런 장난은 치지 않는 그였지만 이상하게 무슨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까까지만 해도 맴돌던 긴장감은 이미 풀려버린 지 오래였다. 머릿속으로 천천히 마음먹은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이곳에서 이 일의 근원을 찾으려고, 이 일이 내가 해결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나왔었다는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을 할려 했더라?

 

 

"현ㅎ-?"

 

 

갑자기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전혀 몰랐다. 분명 스티브를 만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오는 터라 당황한 것까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점점 몽롱해지는 의식의 끝에 결국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고 끝 가지 붙잡고 있던 의식은 끊겨버렸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녀는 눈을 감고 쓰러질 뻔했지만 간신히 부축했다. 역시- 이 방법이 최선책이었다. 그녀의 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인이어를 빼낸 뒤, 손에 올려 힘을 꽉 쥐자 산산조각이 났고 근처에 있는 건물잔해 위에다가 버렸다. 안정적인 자세로 그녀를 안은 뒤, 근처에 놓아둔 수면가스의 통을 잠갔다. 나는 이 가스를 맡아도 아무렇지 않지만 이런 것에 대해 면역이 없는 그녀라면- 천천히 공기 중에 냄새를 썩이게 한다면 그녀는 금방 잠들 거라는 생각을 했고 예상대로 그녀는 잠들었다.

 

 

"완료하셨나요?"

"그래. 가지."

 

 

헬멧을 다시 눌러쓰자 한쪽 귀에서 짧은 잡음이 들려온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본부에서의 연락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금방 간다는 말을 하자 나와 그녀를 데려갈 비행선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고는 이내 연락이 끊겼다. 건물 잔해들 사이에 나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주변은 무척이나 조용했고, 오로지 내 귀에는 그녀의 작은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현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 편안한 자세로 잠든 그녀는 마치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듯해 보였다. 그래-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깊은 꿈에 빠져있어 줘.

 


 

폭신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그것을 꽉 잡고 얼굴을 비비면 얼굴에서도 기분 좋은 느낌이 똑같이 느껴진다. 조금 더- 조금 더 이곳에서 잠들어있고 싶어- 배를 덮고 있는 이불 같은 것을 잡아당기면서 몸을 웅크리면 이 촉감이 몸 전체에 퍼져 나간다.

 

하지만 그 생각도 얼마 가지 못하고 부스럭거리는 주변소리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가 거슬려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더듬거리다가 똑같은 부드러운 감촉에 두툼한 베개 같은 것을 잡아끌어 양 귀를 막아보지만, 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아- 조금만... 조금만 더 잘래요..."

 

 

눈도 뜨지 못하고 잠기운이 약하게 섞여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소리는 이내 멈추고 의자를 끄는듯한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고 더는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 불어오는 소리만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자 다시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잠이 들려 했지만, 갑자기 든 생각 하나가 잠을 달아나게 하였다. 혼자 사는 집에 누구랑 같이 있는 거지? 애초에 나는 임무 때문에 출동했었고-

 

 

"여기는 어디야...?"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한 하늘빛이 돌고 있는 침대보에 얇은 이불, 귀를 막았을 때 사용한 거 같은 하얀색 베개가 한쪽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살랑거리며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레이스로 장식되어있는 커튼은 바람을 따라 펄럭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긴장감 때문인지 침대보 위에 올려진 손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내 옷은 이미 하얀색 드레스로 바뀌어 있었고 묶여있던 머리도 풀어져 있었다. 이 방 어디에도 쓰러지기 전에 입고 있던,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났네, 현화."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책을 덮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내 손 위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손 위에 올려진 손을 따라 시선이 멈춘 곳에는 스티브-그가 앉아있었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살짝 힘을 주어 가볍게 내 손을 누르는 그였다. 그와 만났을 때 내 손목을 잡고 있던 힘보다는 약하게 느껴졌다.

 

 

"여긴 어디에요? 왜 절 데려온 거에요?"

"쉴드가 찾지 못하는 곳."

 

 

짧은 대답을 하고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그였다. 책을 옮길 때에도 조금 멀리 떨어진 컵을 챙겨 들어 나에게 건넬 때까지도 내 손을 누르고 있는 힘을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쉴드가 찾지 못하는 곳이라면 도망가지도 못해요." 라고 컵을 받아들면서 말을 하자 금방 손을 떼는 그였다. 쉴드가 찾아내지 못한 곳이라면 조사를 계속해오던 나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란 걸 단번에 직감했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가정해도 금방 붙잡혀올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한번 바라보고 손에 들린 하얀색 컵 안을 보았다. 컵 안에는 붉은빛이 도는 시원한 음료가 들어있었다. 한 모금을 마시니 석류 맛이 입안 곳곳에 퍼져 나간다. 

 

 

"쉴드가 찾지 못하는 곳도 있었네요. 거의 모든 곳을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쉴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에 깍지를 낀 손은 편안하게 무릎 위에 올린 채 나를 바라보는 스티브였다. 의식이 끊기기 전에 보았던 옷과 똑같았다. 달라진 것이라곤 징표라도 되듯 묻어있던 피가 말끔하게 지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평소 봐오던 모습을 변한 거 없이 그대로라는걸 보여주듯이 예전과 무척이나 똑같았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건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엄지손가락이 깍지낀 채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지면서 빤히 바라보자 내 표정을 읽었는지 손을 풀고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그였다.

 

 

"...이제 여기서 지내면 돼."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야. 이제 쉴드와 엮일 없이 여기서 같이 지내면 돼."

 

 

자칫하다 손에 들린 컵을 침대 위에 엎을뻔했다.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더니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오고 그 어떤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여기서 지내라니. 쉴드는? 다른 동료는?

 

생각할 시간이라도 줄려는 듯이 이 방을 나가려는 스티브 앞을 가로막아야만 한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침대에서 벗어나자마자 몸이 살짝 기우뚱했지만 금방 다시 중심을 잡고 그의 옷깃을 잡고서 앞을 가로막았다.

 

 

"돌려보내 줘요. 쉴드로 돌아가야 해요."

"아니 쉴드로는 돌려보내지 않을 거야."

"왜요? 계속 의지하고 버텨온 곳이에요. 전 돌아가야만 해요.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면 타당한 이유를 설명해줘요."

 

 

설명해주길 아무리 바라도 스티브는 내 양팔을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잡고 있던 옷깃을 놓자 내 양팔에 느껴지던 힘도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대답해주길 바랬지만 스티브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이곳을 나갔다. 다시 붙잡아서 묻고 싶었지만 나갈 수 있는 문은 굳게 잠겨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열리지 않는 문은 내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단 걸 알려주고 있었다.

 


 

망설였다. 어떻게든 이곳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했었다. 그녀가 완강히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만을 주장한다면 그것마저 꺾어버릴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표정에, 손짓에 망설이지 않겠다는 다짐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그녀의 눈빛에 생각이 무뎌졌고, 체온에 굳게 먹은 마음이 흔들렸고, 목소리에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하였다.

 

다시 심호흡하고 들어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이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녀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있다가 다시올께."

 

 

복도를 지나가면서 힐끔- 쳐다보는 사람들, 나를 붙잡고 "그녀는?"이라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시하거나 아직이라고 대충 둘러대고는 작은 실마리라도 잡아 대화를 이어 나가보기 위해 그녀의 물건이나 좋아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이곳에 데리고 올 때 입고 있던 옷이나 소지품을 챙기고 부탁해놓은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 들고선 다시 그 방앞으로 향했다.

 

분명 자신 있게 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 다시 서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생각했다.

 

 

"지금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다시 한 번 되짚으면서 정리하자 가득 채우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은 하나하나 매듭풀 듯이 풀리더니 천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해줄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간 뒤 한참을 벽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가만히 있다가 발끝부터 느껴지는 추위에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가 이불을 몸에 감아 눈만 내밀고선 침대에 누웠다.

 

아무말 없이 그는 떠났다, 그리고 아무말 없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던 이유를 적어도 나에만큼은 설명해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고 무언갈 망설이는 거 같았다.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골똘히 생각을 해보아도 왜 그런 행동을 내 앞에서만 보인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마치 지금 내앞에서 보이는 그런 행동들은 예전의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오는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뜨고 있던 눈을 지그시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무언가를 내려놓는 듯한 소리, 스르륵- 의자에 무언가를 걸쳐놓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나 난 뒤 그 뒤로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계속 가만히 소리에 집중해도 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눈을 뜨고 확인하려는 순간 침대에 앉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안하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바로 나가버리는 그였다.

멍하니 그가 나가버린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건 모든 게 변해버린 것만 같은 그여도 아직은 어딘가에 내가 알고있는 그의 모습이 남아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결국은 말하지 못했다. 그녀의 물건들 돌려주고, 허기가 졌을까- 작은 걱정에 평소에 즐겨 먹던 음식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곳으로 넘어왔는지, 내가 왜 당신을 데려왔는지 모든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다시 한 번 그녀를 보니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들이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이 없어져 버렸다.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내 욕심 때문에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내가 망설이는 바람에 그녀에게 제대로 된 설명조차 해주지도 못했다. 

 

 

"...미안하네."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다른 말들도 이어서 말하고 싶었지만,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잠든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방을 나왔다.

 

이번 상황에서만큼은 결단력이 무척이나 필요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왜 자꾸 그녀를 보면 망설이는 걸까.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그 어떤 거에도 물들이고 싶지 않은 걸까? 그녀를 보면 볼수록 결심해온 것들이 흔들리고 망설여지게 된다.

 

 

"한동안은 만나면 안될 거 같군."

 

 

한동안 만나지 않는다면 이런 망설임도 없어지겠지 그리고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한동안 그는 찾아오지 않았다. 식사라던가 옷들은 검은색과 빨간색들이 섞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종종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이 방안이 전부였다. 책을 읽는다든가, 창밖으로 밖의 경치를 구경한다든가, 아니면 수면을 취한다는 등의 한정적인 행동들 뿐이었다.

 

나가고 싶다- 라는 생각은 종종 했었다. 하지만 이 방을 나섰을 때 겪게 될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에 그 생각들은 이미 접어 없애버린 지 오래였다. 멍하니 창밖을 통해 풍경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냈었다.

 

달빛이 들어오는 어느 날 밤, 그날과 똑같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불을 덮고 베개를 끌어안고 단잠에 빠져있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단잠은 깨지고 말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침대 한쪽 부분에 무게가 쏠리는 느낌이 들어 몸을 일으켜 보자 그곳에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그가 엎드려 있었다.

 

 

"스티브?"

 

 

오랜만에 본 그는 처음 다시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임무를 나갈 때 입고 있던 복장과 똑같았고, 그의 무기이자 상징인 방패는 방 한쪽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전투를 끝내고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의 징표라도 되는 것인지 몸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이었더라면 지금은 슬픔에 잠겨있는 눈빛이었다.

 

다시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뻗어오는 손길에 그는 살짝 주춤하는 듯 해 보였지만 조용히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하나하나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고, 때려는 순간 그의 손이 내 손 위로 올라왔다.

 

 

"가지 말아줘."

"...어디 안 가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 허리 부분으로 손을 뻗은 그는 허리를 감싸고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또다시 나타난 걸까. 생각이라도 갑자기 바꾼 걸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뒤엉켰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문제였다. 그냥- 그 상황에서 나는 그를 달래주는 행동밖에 할 수 없었다.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돌려받은 휴대폰에서는 그 어떤 부재중도 오지 않았다. 심지어 쉴드에서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생각하는 것을 강요받고 타협 받은 것도 아녔다. 이곳에서 나는 나인 그대로 남아있었다. 똑같은 일과를 보내고 달빛과 함께 밤바람이 불어올 때쯤 찾아오는 그를 맞이하고 조용히 토닥여주는 그런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아직도 내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그가 왜 그곳으로 넘어갔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그가 나에게 호의를 보이고 예전과 똑같이 대한다면 내 앞에서의 그는 과거의 모습과 똑같기에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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